늦은 이사, 낡은 서랍장 하나
박은지 씨(가명, 34세)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작업실 겸 집으로 쓸 원룸형 오피스텔로 이사하면서, 예산을 아끼려고 중고 거래 앱으로 오래된 서랍장 하나를 사들였다. 옻칠이 반쯤 벗겨진 원목 서랍장이었지만, 서랍이 다섯 칸이나 되어 수납하기엔 충분해 보였다.
판매자는 이삿짐을 정리하다 나온 물건이라며, 서랍 안은 미리 다 비웠다고 했다. 박 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배송받은 서랍장을 방 한구석에 들였다.
서랍 안쪽에서 나온 것
며칠 뒤, 서랍 안쪽을 마른걸레로 닦다가 맨 아래 칸 가장 깊숙한 구석에서 손끝에 뭔가 걸렸다. 누렇게 색이 바랜 신문지 뭉치였다. 오래된 청테이프로 서랍 안쪽 벽면에 단단히 붙여져 있었다.
테이프를 뜯고 신문지를 펼치자 안에서 헝겊 인형 하나가 나왔다.
손바닥 두 개를 편 정도의 크기, 빛바랜 베이지색 광목천을 둘둘 말아 만든 몸통에 뭉툭한 팔다리가 실로 대충 매듭지어져 있었다. 얼굴에는 눈코입 없이 누렇게 얼룩진 자국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목 부분에는 붉은 실이 열 바퀴도 넘게 촘촘히 감겨 단단히 매듭져 있었다. 마치 목을 조르듯이.
배 쪽에는 가로세로 3센티미터쯤 되는 흰 무명 조각이 삐뚤게 덧대어 꿰매져 있었고, 그 위에 검은 실로 두 글자가 손바느질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말순
박 씨는 잠시 인형을 들여다보다가, 어쩐지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기가 꺼림칙했다. 판매자에게 연락해볼까 하다가 이내 그만두고, 신발 상자에 인형을 다시 넣어 붙박이장 맨 위 칸에 올려두었다. 나중에 정리하자는 생각이었다.
밤마다 들리는 바느질 소리
그날 밤부터였다. 자려고 누우면 붙박이장 쪽에서 사각사각, 실이 천을 통과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옷장 안 옷걸이가 흔들리는 소리인 줄 알았다.
소리는 매일 밤 자정을 넘기면 시작됐다. 사각. 사각. 사각. 규칙적이고 느린 간격으로.
어느 밤엔 눅눅한 걸레 냄새 같은 습한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창문을 열어도, 환기를 시켜도 냄새는 붙박이장 앞에서만 유독 짙어졌다.
참다못한 박 씨는 손전등을 들고 신발 상자를 다시 열어봤다. 인형은 그대로였다. 베이지색 광목 몸통, 목에 감긴 붉은 실, 배에 꿰매진 흰 조각과 그 위의 '말순'이라는 두 글자까지 전부 처음 발견했을 때와 똑같았다.
다만 목에 감긴 붉은 실이, 처음보다 한두 바퀴 더 감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박 씨는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상자 뚜껑을 다시 닫았다.
잘못 배달된 편지
일주일 뒤, 우편함에 낯선 이름 앞으로 온 편지 한 통이 꽂혀 있었다. 지역 보건소에서 발송한 건강검진 안내 우편이었다. 수신인 이름은 '말순'. 주소는 정확히 박 씨가 사는 호수였다.
관리사무소에 문의했다. 관리소장은 입주자 명부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 호수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살았던 기록은 없다고 했다. 적어도 최근 5년 안에는.
박 씨는 단순 오배송이겠거니 넘겼다. 그런데 그 뒤로도 비슷한 우편이 계속 왔다. 노인 대상 복지관 소식지, 병원 진료 예약 알림, 심지어 동주민센터에서 보낸 안부 확인 엽서까지. 모두 같은 이름, 같은 정확한 호수였다.
박 씨는 처음으로 서랍장을 판 사람에게 다시 연락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계정은 이미 탈퇴된 상태였다.
버리려던 밤
박 씨는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늦은 밤, 신발 상자째로 인형을 꺼내 다시 신문지에 싸고 테이프로 단단히 감쌌다. 그리고 건물 뒤편 종량제 봉투 배출 구역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집으로 올라오며 박 씨는 왠지 모르게 자꾸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날 밤, 잠결에 무언가 바닥을 끄는 소리를 들었다. 스윽. 스윽. 무거운 것이 조금씩 끌리는 소리가 현관에서 방 안쪽까지 이어졌다.
박 씨는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소리는 정확히 붙박이장 앞에서 멈췄다.
다음 날 아침, 떨리는 손으로 붙박이장 문을 열었다. 신발 상자가 원래 자리, 맨 위 칸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상자를 열자 신문지에 싸인 인형이 다시 나왔다. 베이지색 몸통, 얼룩진 무표정한 얼굴, 배에 꿰매진 흰 조각과 그 위의 '말순'이라는 글자까지 똑같았다.
다만 목에 감긴 붉은 실은 이전보다 훨씬 촘촘해져 있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가 더 늘어난 것처럼. 그리고 매듭 부분에는 마치 방금 새로 꿰맨 듯, 아직 마르지 않은 실 냄새가 났다.
아직 서랍 속에 있는 것
박 씨는 그날 이후로 인형을 다시 버리지 않았다. 버리는 순간 무언가 더 나빠질 것 같다는,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형은 지금도 그 붙박이장 안, 신발 상자 속에 그대로 있다. 박 씨는 가끔 자정 무렵, 사각사각 실이 천을 통과하는 소리와 함께 낮고 희미한 목소리를 듣는다.
"말순아..."
박 씨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고 궁금해한다.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애초에 존재했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 인형을 찾고 있는 것인지.
이 이야기는 완전히 창작·각색된 콘텐츠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인물이나 장소, 사건과는 무관하며,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