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제사
올해 37세인 한 씨(가명)는 아내 윤 씨(가명, 34세)와 함께 충청남도 시골 본가를 찾았습니다. 돌아가신 증조할머니의 기일이었습니다. 증조할머니는 한 씨가 태어나기도 전인 1987년에 돌아가셨고, 한 씨조차 사진으로만 뵌 분이었습니다.
아내 윤 씨는 시댁 제사에 처음 참석하는 것이었습니다. 결혼 3년 차였지만 코로나와 이런저런 사정으로 번번이 못 갔던 것입니다.
제사는 별일 없이 끝났습니다. 다만 한 씨의 어머니가 한마디 하셨습니다.
"윤 씨, 제사상 앞에서 절할 때 눈 감지 마. 증조할머니가 어두운 데서 눈 감는 거 안 좋아하셨어."
윤 씨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냥 시어머니의 잔소리려니 했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것은 밤 11시쯤이었습니다. 피곤했던 두 사람은 씻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새벽에 시작된 중얼거림
한 씨가 잠에서 깬 것은 새벽 2시 반쯤이었습니다.
옆에서 윤 씨가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잠꼬대려니 했습니다. 한 씨는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멈추지 않았습니다.
중얼거림이 점점 또렷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윤 씨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낮고 갈라진 목소리. 노인의 목소리. 충청도 억양이 강하게 섞인.
한 씨는 벌떡 일어나 스탠드를 켰습니다.
윤 씨는 똑바로 누운 채 천장을 보고 있었습니다. 눈이 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점이 없었습니다. 동공이 풀려 있었고, 입만 계속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오지마라... 그 물 먹지마라... 우물에... 우물에 넣었어..."
한 씨는 아내의 어깨를 흔들었습니다. "여보! 여보, 일어나!"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윤 씨의 입에서 일본어가 나왔습니다.
"미즈... 미즈오 노무나... (水を飲むな...)"
한 씨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윤 씨는 일본어를 전혀 모릅니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고, 일본에 간 적도 없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한 씨는 공포를 억누르고 스마트폰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윤 씨의, 아니 그 목소리의 중얼거림은 약 12분간 계속되었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뒤섞인 문장들. 대부분은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몇 가지가 또렷했습니다.
"...큰아들이 판 거여... 논을 팔아버렸어... 내 논을..."
"...셋째는 안 왔어... 왜 안 와... 기일인데..."
"...우물물 먹지 마라... 거기 넣었어... 일본 사람들이... 넣었어..."
12분 뒤, 윤 씨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했습니다. 그리고 눈이 감겼습니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씨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윤 씨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꿈도 안 꿨는데?"라며 의아해했습니다.
한 씨는 녹음 파일을 어머니에게 들려드렸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숨소리가 멈추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 목소리... 증조할머니 목소리여."
"네?"
"증조할머니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어를 할 줄 아셨어. 그리고 큰아들이 논 판 건...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여. 나도 시어머니한테 한 번 들은 거고."
한 씨가 물었습니다. "우물은요? 우물에 뭘 넣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어머니는 한참 침묵했습니다.
"...본가 뒤에 옛날 우물이 하나 있었어. 일제 때 일본군이 마을에 주둔했었는데... 해방 뒤에 어른들이 그 우물을 메워버렸대. 이유는 아무도 안 가르쳐줬어. 그냥 그 물 먹지 말라고만 하셨어."
두 번째 밤
한 씨는 그날 밤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정확히 같은 시간. 윤 씨가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윤 씨가 일어나 앉았습니다. 눈을 뜬 채. 초점 없는 눈으로.
그리고 한 씨를 보았습니다.
아내의 얼굴이었지만, 표정이 달랐습니다. 34세 여성의 얼굴에 80대 노인의 표정이 겹쳐 있었습니다. 입꼬리가 아래로 처지고,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눈이 가늘어진.
그 표정으로 한 씨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습니다.
"...네가 종손이지?"
한 씨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우물 파봐라. 거기 있어."
"뭐가... 뭐가 있는데요?"
윤 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아내의 미소가 아니었습니다. 평생의 한이 서린, 쓸쓸하고 차가운 미소.
"증거."
그 한마디를 끝으로 윤 씨는 다시 쓰러지듯 눕더니 잠들었습니다.
아직 파지 못한 우물
한 씨 부부는 다음 날 절에 가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뒤로 윤 씨의 증상은 멈췄습니다.
하지만 한 씨는 아직 그 녹음 파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가 뒤편, 시멘트로 메워진 옛 우물터를 알고 있습니다.
한 씨의 아버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버지는 화를 내셨습니다.
"그 우물은 건드리면 안 돼!"
"왜요?"
"...왜냐고? 나도 몰라. 다만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언으로 남기셨어. 그 우물은 절대 파지 말라고. 파면... 마을이 끝난다고."
한 씨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아내의 얼굴을 확인합니다.
윤 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잠듭니다.
다만 가끔.
아주 가끔.
한 씨가 깜빡 잠들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윤 씨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소리는 나지 않습니다.
그냥 입술만.
한 씨는 그때마다 눈을 감습니다.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물도 파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파지 않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체험담을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체험자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으며, 특정 장소를 지목하지 않았습니다. 심장이 약하신 분은 주의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