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유품 정리
올해 26세인 박 씨(가명)는 올해 초 외할머니를 여의었습니다. 향년 89세. 충남 시골 마을에서 평생을 살았던 분이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49재가 끝난 뒤, 박 씨는 어머니와 함께 할머니 집의 유품을 정리하러 내려갔습니다.
할머니는 평생 혼자 사신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로 재혼도 하지 않고 작은 한옥에서 60년 넘게 사셨습니다.
집 안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가득했습니다. 낡은 장롱, 흑백 사진, 누렇게 변한 편지들.
박 씨가 안방 장롱을 옮기던 중이었습니다.
장롱 뒤 벽지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낡은 벽지를 살짝 들추자, 그 안에 무언가가 붙어 있었습니다.
벽 속의 부적
노란색 한지에 붉은 먹으로 쓴 부적이었습니다.
한자와 알 수 없는 문양이 빼곡했습니다. 부적의 네 귀퉁이에는 검은 실로 무언가를 꿰맨 흔적이 있었고, 가운데에는 머리카락 한 다발이 접혀 있었습니다.
"엄마, 이거 뭐야?"
어머니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건드리지 마."
어머니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말씀하셨어. 그 벽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그 뒤에 있는 건 떼면 안 되는 거라고."
박 씨는 웃었습니다. 미신을 믿지 않았으니까요.
"엄마, 21세기에 무슨 부적이야. 어차피 집 철거할 건데."
박 씨는 부적을 벽에서 떼어냈습니다.
떼어내는 순간, 부적 뒤에서 검은 물이 한 방울 떨어졌습니다. 벽 안에 습기가 찬 것이겠지, 라고 박 씨는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날 밤부터
박 씨와 어머니는 할머니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습니다. 유품 정리가 덜 끝났으니까.
새벽 2시.
박 씨는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긁는 소리.
서걱. 서걱. 서걱.
벽 안쪽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부적이 붙어 있던 바로 그 벽에서.
쥐가 들어왔나 싶었습니다. 시골집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소리의 패턴이 이상했습니다. 불규칙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리듬이 있었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손톱으로 벽을 긁고 있는 것처럼.
서걱. 서걱. 서걱.
멈추었다가.
쾅.
벽이 한 번 크게 울렸습니다. 박 씨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3월이었지만 숨이 하얗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냄새.
향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절에서 맡을 수 있는 그 향. 아무도 향을 피운 적이 없는데.
벽에 생긴 것
박 씨는 손전등을 켜고 부적이 있던 벽을 비추었습니다.
소리가 멈추었습니다.
벽에는 아까까지 없던 것이 있었습니다.
부적을 떼어낸 자리. 그 노출된 벽면에 손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밀어낸 듯한. 다섯 손가락이 선명한.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벽면 전체에. 수십 개의 손자국이. 안에서부터 밀고 나오려는 듯.
박 씨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 비명에 어머니가 뛰어왔습니다. 어머니는 벽을 보자마자 주저앉았습니다.
"내가 떼지 말라고 했잖아..."
어머니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그러셨어. 이 집을 지을 때 무당이 와서 그 부적을 붙였다고. 이 땅에 묻혀 있는 것들을 눌러두는 거라고. 절대 떼면 안 되는 거라고."
뒤늦은 봉안
그날 밤, 박 씨와 어머니는 집을 나와 마을 이장님 댁에서 잤습니다.
다음 날 어머니가 수소문 끝에 찾은 법사님이 그 집을 찾았습니다.
법사님은 벽을 보자마자 말했습니다.
"원래 세 장이었을 겁니다. 동, 서, 북. 세 방향을 막았는데, 한 장이 빠지니 길이 열린 겁니다."
법사님이 새 부적을 쓰고 의식을 하는 데 세 시간이 걸렸습니다.
의식 중에 법사님의 코에서 피가 흘렀고, 같이 온 보조 두 명 중 한 명은 갑자기 구역질을 하며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의식이 끝나고 법사님이 말했습니다.
"이 땅에 오래된 것들이 있습니다. 제가 다시 막아놓았지만... 한 번 열린 길은 완전히 닫히지 않습니다. 이 집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면 안 됩니다."
박 씨네 가족은 일주일 뒤 그 집을 철거했습니다.
철거 당일. 포크레인이 안방 벽을 부수었을 때.
벽 안에서 검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배관도 없고 수원도 없는 흙벽 안에서. 양동이 두 개 분량의 검은 물이.
포크레인 기사가 말했습니다. "30년 넘게 이 일 했는데, 이런 건 처음 봅니다."
그 물에서는 향 냄새가 났습니다.
박 씨는 지금도 가끔 꿈을 꿉니다.
어두운 벽 안에서 수십 개의 손이 밀고 나오는 꿈을.
그리고 그 꿈을 꾸는 날이면, 아침에 베개에서 향 냄새가 납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체험담을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체험자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으며, 특정 장소를 지목하지 않았습니다. 심장이 약하신 분은 주의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