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이 잦아진 뒤로 시작된 것
이수민 씨(가명, 29세)는 콘텐츠 제작 스타트업에서 영상 편집을 맡고 있다. 마감이 겹치는 주에는 새벽 두 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들었고, 휴대폰은 항상 베개 옆, 손을 뻗으면 닿는 자리에 두고 잤다. 알람도 걸어야 했고, 급한 연락이 오면 바로 확인해야 했으니까.
야근이 반복되던 어느 주부터, 수민 씨는 잠든 지 얼마 안 되어 눈을 뜨는 일이 잦아졌다. 눈은 떠지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발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흔히 말하는 가위눌림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렘수면 상태에서 의식만 먼저 깨어나면 생기는 흔한 현상이라고 했다. 불규칙한 수면과 만성 피로가 겹치면 나타나기 쉽다고. 요즘 생활 패턴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 없는 증상이었다.
문제는 그 순간마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이명이나 환청이라고만 생각했다. 낮고 일정한, 사람 목소리 같기도 하고 기계음 같기도 한 소리가 웅웅거렸다.
저절로 켜지는 화면
가위에 눌리고 나면 수민 씨는 늘 온몸에 힘이 빠진 채로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시간을 보려는 습관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몸이 풀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시간이 아니었다. 베개 옆에 놓인 휴대폰 화면이 켜져 있었다. 잠금 화면도, 화면보호기도 아니었다. 녹음 앱이 실행된 채, 빨간 원이 깜빡이며 녹음 중이라는 표시를 띄우고 있었다.
수민 씨는 그 앱을 켠 적이 없었다. 잠들기 전 손도 대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정지 버튼을 누르고 파일을 확인했다. 재생 시간 3분 47초. 방금 가위에 눌려 있던 시간과 비슷했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처음 몇 초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서른일곱. 서른여섯. 서른다섯...
사람 목소리 같았지만, 억양도 감정도 없었다. 누군가 그저 숫자를 세고 있었다. 거꾸로.
파일이 끝나는 지점, 숫자는 "하나, 영"에서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 영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정확한 순간, 재생 시간 표시도 끝났다. 3분 47초.
가위에 눌려 있던 시간과, 녹음이 끝난 시간과, 몸이 풀린 순간이 전부 같았다.
매일 밤 줄어드는 숫자
수민 씨는 우연이라고 믿고 싶었다. 앱 설정을 다시 확인하고, 자동 실행 관련 기능도 전부 껐다. 손이 닿지 않게 휴대폰을 서랍 안에 넣고 잠들기도 했다.
소용없었다. 다음번 가위에 눌린 밤에도, 서랍 속 휴대폰에서는 녹음 앱이 켜져 있었다. 이번엔 숫자가 "스물둘"부터 시작됐다.
그다음엔 "열넷"부터.
숫자가 시작되는 지점이 매번 조금씩 낮아지고 있었다. 마치 카운트다운이 어딘가에서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수민 씨가 듣는 부분만 매번 조금씩 뒤쪽인 듯했다. 혹은, 정말로 뭔가가 줄어들고 있다는 듯이.
수민 씨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 경험을 조심스럽게 적어봤다. 가위눌림 중 환청 이야기는 흔하다고들 했다. 하지만 실제로 녹음 파일이 남는다는 이야기에는, 아무도 선뜻 답을 달지 못했다.
영에 닿는 순간
가장 최근 밤, 수민 씨는 또 눈을 떴다.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귓가에서 이미 숫자가 세어지고 있었다.
다섯. 넷. 셋...
이번엔 시작부터 너무 낮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몸은 손끝 하나 반응하지 않았다.
둘. 하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영.
그 순간, 몸이 풀렸다.
동시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숨소리 같은 것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의 숨결처럼 따뜻했다.
수민 씨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휴대폰만, 녹음 화면을 띄운 채 조용히 놓여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카운트
수민 씨는 그날 이후로 녹음 앱을 완전히 삭제했다. 그런데도 얼마 뒤, 클라우드 백업 폴더에서 낯선 파일 하나를 발견했다. 삭제한 기억이 없는 녹음 파일이었다.
재생 시간은 단 4초. 열어보기가 두려웠지만, 결국 눌렀다.
하나.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정적.
수민 씨는 요즘도 새벽에 눈을 뜬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면, 자기도 모르게 숫자를 센다. 다음 숫자가 몇에서 시작할지, 그리고 그 숫자가 정말 "영"에서 멈출지, 아니면 어느 밤엔 시작부터 이미 영으로 되어 있을지.
수민 씨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창작·각색된 콘텐츠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인물이나 장소, 사건과는 무관하며,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