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으면 시작되는 순찰
청림역은 하루 평균 6만 명이 오가는 서울의 평범한 환승역이다. 박도현 씨(가명, 34세)는 이곳에서 3년째 야간 보안관제 용역으로 일한다. 막차가 끊긴 새벽 1시부터 첫차가 들어오기 전인 새벽 5시 반까지, 그는 홀로 텅 빈 역사 전체를 순찰한다.
승객들은 모른다. 지하 3층 승강장 아래, 지하 4층과 5층에 아무도 모르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원래 다른 노선과의 환승을 위해 미리 뚫어놓은 구조물이었지만, 예산 문제로 사업이 전면 백지화되면서 한 번도 개통되지 못한 곳이었다. 사내에서는 그곳을 "존재하지 않는 층"이라 불렀다. 역사 안내도에도, 비상 대피도에도 표시되지 않는다. 굳게 닫힌 철제 셔터 하나가,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지하철역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박 씨는 처음 몇 달간 그 셔터 앞을 그냥 지나쳤다. 순찰 구역에도 포함되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있어서는 안 될 소리
그런데 언제부턴가, 새벽 2시만 되면 셔터 너머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철컹, 철컹. 레일 위를 구르는 낮은 진동음. 그리고 뒤이어, 끼익 - 열차가 멈추는 소리.
박 씨는 처음엔 위층 승강장의 소음이 울린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위층은 막차 이후 완전히 조용했다. 심야에 운행하는 열차는 단 한 대도 없었다.
셔터에 귀를 대 보았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다가, 문이 열리는 특유의 공기 빠지는 소리를 내며 멈췄다.
그리고 침묵.
정확히 그 순간, 안내방송처럼 들리는 낮은 웅웅거림이 이어졌다. 사람 말소리 같기도 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먼지 위에 남은 선명한 발자국
동료들에게 물어봤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여기 무슨 열차가 다녀요, 거긴 콘크리트로 막힌 빈 통로예요." 관리소장도 같은 말을 했다. 다만 그의 표정은, 뭔가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박 씨는 결국 규정을 어기고 마스터키로 셔터 옆 비상통로 문을 열었다.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4층. 미완성 승강장이 나타났다. 스크린도어도, 조명도 없었다. 벽 타일 절반은 시공되다 만 채 노출 콘크리트 그대로였다. 구석에는 사업 백지화 훨씬 전, 완공 예정이라고 적힌 빛바랜 안내판이 아직도 걸려 있었다.
먼지는 두껍게 쌓여 있었다. 그런데 승강장 끝에서 끝까지, 선명한 발자국 한 줄이 나 있었다. 방금 찍힌 것처럼 또렷했다.
발자국은 그가 서 있는 계단 쪽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승강장 저 안쪽, 캄캄한 터널 방향에서부터 걸어 나온 흔적이었다.
벽에는 낙서도 있었다. 스프레이가 아니라, 손톱으로 긁어낸 듯한 글씨.
"여긴 아직 안 열렸어요."
날짜도, 서명도 없었다. 그 옆 바닥에는 우산 하나와, 오래전 유행이 끝난 브랜드의 학생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먼지는 쌓여 있었지만, 물건 자체는 부식되지 않고 멀쩡했다.
승강장에 들어온 것
박 씨가 가방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철컹, 철컹.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이번엔 셔터 너머가 아니라, 바로 이 승강장, 그가 서 있는 곳에서.
터널 안쪽에서 빛 한 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박 씨는 손전등을 껐다. 숨을 참았다.
빛은 점점 커졌다.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 문이 열리는 소리.
그런데 아무것도 내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타지 않았다.
승강장에는 그와, 저 안쪽 어둠 속에서 이쪽을 향해 서 있는 사람의 형체 하나뿐이었다.
형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살짝, 그를 향해 기울였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열차 소리가 멀어졌다.
박 씨는 계단을 향해 뛰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직도 그 열차는 정차한다
그날 이후 박 씨는 그 구역 순찰을 그만뒀다. 회사에는 몸이 안 좋다고 둘러댔다.
인수인계를 받은 후임 역시 얼마 못 가 야간 근무를 그만뒀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됐다.
박 씨는 가끔 궁금하다. 그 가방과 우산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완공되지 못한 채 파묻힌 그 승강장에, 대체 무엇이 먼저 도착해 있었던 걸까.
지금도 청림역 지하 4층 셔터 너머에서는, 아무도 타지 않을 열차가 새벽 2시마다 정확히 정차한다.
혹시 늦은 밤 지하철역 깊은 곳에서 낯선 진동을 느끼신 적이 있다면, 그 아래 몇 층이 더 있는지 한 번쯤 확인해 보시길.
이 이야기는 완전히 창작·각색된 콘텐츠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지하철역이나 노선, 인물과는 무관하며,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