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잘 드는 3층, 새로 이사한 집
이○○ 씨(가명, 31세)는 4월 마지막 주에 경기도의 한 다세대 주택 3층으로 이사했습니다. 회사와 가깝고, 무엇보다 베란다로 오후 볕이 길게 들어오는 게 마음에 들어 계약한 집이었습니다.
부동산 사장님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며 가볍게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전 세입자분이 좀... 급하게 나가셨어요. 사정이 있으셨나봐요."
지유 씨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어디든 사정 없는 이사가 있겠나 싶었습니다.
짐을 들이던 날, 베란다 구석 작은 붙박이장을 열었을 때 지유 씨는 잠깐 멈칫했습니다. 안쪽 선반에 마른 꽃 몇 송이와 좁쌀이 담긴 흰 그릇, 다 타버린 양초 밑동, 빛바랜 붉은 천 조각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향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습니다. 청소를 하다 만 듯한 흔적이었습니다.
지유 씨는 별생각 없이 모두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렸습니다. 선반을 물걸레로 닦아내고, 그 자리에 빨래 건조대를 펼쳐두었습니다.
그날 밤은 평소처럼 지나갔습니다. 짐 정리를 마치고, 치킨을 시켜 먹고, 자정 무렵 잠이 들었습니다.
점점 비어가는 시간들
이상한 일은 일주일쯤 지나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출근길, 회사 동료가 지유 씨에게 물었습니다.
"어제 퇴근하면서 갑자기 사투리 쓰시던데, 고향이 어디세요?"
지유 씨는 사투리를 쓴 기억이 없었습니다. 어제 퇴근 인사를 나눈 것조차 흐릿했습니다. 분명 회사에서 집까지 걸어온 건 기억나는데, 그 사이 누구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마치 필름이 끊긴 것처럼 비어 있었습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됐습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와 "어제 통화할 때 목소리가 왜 그렇게 낮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지유 씨는 그 친구와 통화한 사실 자체를 몰랐습니다. 휴대폰 통화 기록에는 분명 23분 7초의 통화가 남아 있었습니다.
베란다 쪽에서 자꾸 향냄새가 났습니다. 향을 피운 적이 없는데도, 마른 꽃과 흙이 섞인 듯한 냄새가 옅게 풍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자다가 눈을 뜨면 손끝에 회색 가루가 묻어 있는 날이 늘었습니다. 처음엔 곰팡이인 줄 알았습니다. 닦아도 닦아도 손톱 밑에 가루가 남아 있었습니다.
가장 무서웠던 건 어느 날 책상 위에서 발견한 메모지였습니다. 분명 자신의 글씨체였는데,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와야 한다. 이제 와야 한다.
지유 씨는 그 메모를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무슨 뜻인지, 왜 자신이 이런 문장을 썼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베란다에 무릎을 꿇고
그날 새벽, 지유 씨는 갑작스러운 한기에 눈을 떴습니다.
시계는 새벽 2시 31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방이 너무 조용했습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귀가 아팠습니다.
베란다 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분명 불을 끄고 잤는데.
지유 씨는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발끝이 차가운 바닥에 닿았습니다. 거실을 가로질러 베란다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붙박이장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 앞에, 누군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지유 씨는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등 뒤에서, 자신의 침실에서 들려야 할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앉아 있는 뒷모습이, 자신의 잠옷과 똑같았습니다.
천천히, 그것이 고개를 돌렸습니다.
지유 씨 자신의 얼굴이었습니다.
다만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입꼬리만 아주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입이 열렸습니다. 지유 씨의 목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지유 씨가 한 번도 내본 적 없는 낮고 갈라진 톤이었습니다.
"오래 기다렸다."
지유 씨는 비명을 지르려 했습니다. 목에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 지유 씨는 침대 위였습니다.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시계는 6시 42분.
손끝에 회색 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무릎에는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차가운 바닥에 오래 꿇어앉아 있었던 사람의 멍이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
지유 씨는 그 주말 바로 부동산을 찾아갔습니다.
사장님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전 세입자는 한동안 원인 모를 환청과 환각, 알 수 없는 신체 통증에 시달렸다고 했습니다. 결국 받아들이지 못하고, 작은 제단만 남겨둔 채 집을 비우고 황급히 떠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흔적은 그냥... 정리가 안 된 거였어요. 별다른 의미는 없을 거예요."
사장님도 확신하지 못하는 목소리였습니다.
지유 씨는 그 집에서 이사했습니다. 새로운 동네, 새로운 집. 베란다도 없는 작은 오피스텔을 일부러 골랐습니다.
하지만 가끔, 정말 가끔, 지유 씨는 낯선 곳에서 정신이 듭니다. 화장실 거울 앞에, 혹은 현관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손끝에는 늘 그 회색 가루가 묻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로 잠꼬대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의 구전 괴담 모티프를 바탕으로 완전히 재창작한 창작 공포 이야기입니다. 실제 인물·장소·사건과 무관하며, 무속 신앙이나 종교를 비하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