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비를 아끼려 시작한 심야 총무
정다은 씨(가명, 26세)는 대학을 졸업하고 반년째 취업 준비 중이었다. 월세와 생활비 부담을 줄이려고 구인 게시판을 뒤지다가 눈에 띄는 공고 하나를 발견했다.
"심야 총무 구함. 숙식 제공, 월급 별도."
학교 앞 원룸텔이었다.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데스크를 지키고, 그 대가로 1층 구석의 작은 총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다은 씨에게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면접을 보러 간 자리에서 원룸텔 사장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며 지나가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전에 계시던 분은 두 달 전에 갑자기 그만두셔서요. 인수인계가 좀... 부실할 수도 있어요."
다은 씨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만두는 이유야 사람마다 다를 테니까.
책상 서랍 속 낡은 노트
첫날 밤, 총무실 책상을 정리하던 다은 씨는 맨 아래 서랍에서 낡은 대학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표지에는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고, 첫 장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반드시 지킬 것
밑에는 번호를 매긴 규칙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 자정이 넘으면 복도 등 스위치를 연속으로 세 번 깜빡이지 말 것
- 304호(공실) 벨이 울려도 절대 응답하지 말 것
- 자정 넘어 "총무님 계세요?"라는 전화가 오면 반드시 한소미라고 답할 것. 본인 이름으로 답하지 말 것
- 순찰 중 세탁실 앞을 지날 때는 뒤를 돌아보지 말 것
- 이 노트는 절대 버리거나 찢지 말고, 반드시 다음 총무에게 물려줄 것
다은 씨는 피식 웃었다. 전임 총무가 장난삼아 써놓은 미신 목록이라고 생각했다. 304호가 공실이라는 것도, 세탁실이 어둡고 으슥하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 어렵지 않게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켜야 했던 이유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다은 씨는 규칙이 그저 미신만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각, 복도 센서등이 이유 없이 깜빡였다. 하나, 둘. 다은 씨는 무심코 손을 뻗어 스위치를 눌렀다가, 규칙 1이 떠올라 황급히 손을 거뒀다. 세 번째 깜빡임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다른 밤에는 인터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호실 번호는 304였다. 공실이어야 할 방.
다은 씨는 화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받지 않았다. 인터폰은 정확히 열두 번을 울리고 끊겼다. 그 뒤로 다은 씨는 노트에 적힌 규칙들을 허투루 넘기지 않게 되었다.
그 전화를 받던 밤
문제는 3주 차, 유난히 피곤했던 밤에 벌어졌다.
새벽 12시 40분, 데스크 전화가 울렸다. 다은 씨는 잠이 덜 깬 채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총무님 계세요?"
낯선 목소리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간이 안 될 만큼 낮고 갈라진 음성. 다은 씨는 규칙을 떠올릴 새도 없이, 습관처럼 대답했다.
"네, 저... 정다은인데요."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전화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아주 오래, 숨소리 같은 것만 이어지다가 뚝 끊겼다.
그날 이후, 다은 씨는 이상한 일들을 겪기 시작했다.
아침에 총무일지를 펼쳐보면, 자신이 쓴 기억이 없는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필체는 분명 자신의 것과 비슷했지만, 어딘가 낯설게 눌러쓴 흔적이었다. "304호 확인함. 이상 없음." 다은 씨는 304호 근처에도 간 적이 없었다.
입주민들도 하나둘 이상한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총무님, 요즘 목소리가 좀... 달라지신 것 같아요."
전화를 받을 때면 자기도 모르게 "네, 한소미입니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아, 죄송해요, 정다은입니다"라고 정정했지만, 정정하는 그 짧은 순간조차 목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
다은 씨는 결국 다시 그 노트를 펼쳤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장도 빠짐없이.
마지막 페이지, 다른 글씨보다 유독 작고 힘없는 필체로 구석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 노트를 읽은 사람은 내가 다섯 번째다. 앞의 네 명은 모두 이름을 잃었다.
다은 씨는 숨이 턱 막혔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목구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내 이름은..."
말하려 했다. 정다은이라고. 분명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달랐다.
"한소미."
다은 씨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분명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아주 잠깐, 자신이 아닌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도 지갑 속 신분증을 확인합니다
그날 새벽, 다은 씨는 짐을 챙겨 원룸텔을 나왔다. 노트는 원래 있던 서랍 속에 다시 넣어두었다. 사장에게는 "개인 사정"이라고만 짧게 말했다.
며칠 뒤, 같은 구인 게시판에 똑같은 공고가 다시 올라온 것을 다은 씨는 우연히 보았다.
"심야 총무 구함. 숙식 제공, 월급 별도."
다은 씨는 지금도 습관처럼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다. 정다은. 틀림없이 맞다.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누군가 뒤에서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기 전에 아주 짧은 순간, 목구멍 안쪽에서 다른 이름이 먼저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창작·각색된 콘텐츠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인물이나 장소, 사건과는 무관하며,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