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째, 같은 자리
스물여섯 이준혁 씨(가명)는 삼 년째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취업 대신 택한 이 길이 벌써 세 번째 낙방으로 이어지면서, 그는 서울 변두리의 낡은 고시원 한 칸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었다.
방은 성인 한 사람이 겨우 눕고 앉을 수 있는 크기였다. 창문 하나 없이 작은 환풍구만 뚫려 있는 벽 앞에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침대가 거의 맞닿아 있었다. 매일 밤 준혁 씨는 자정을 훌쩍 넘기고도 오답노트를 펼쳐 문제를 풀다가, 스스로도 모르게 책상에 엎드려 잠드는 날이 많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붙어야 한다.'
그 생각 하나로 버티는 나날이었다.
스윽, 스윽
처음 가위에 눌린 건 이사 온 지 두 달쯤 됐을 무렵이었다.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눈은 떠졌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렸다.
스윽. 스윽.
연필로 종이를 긁는 듯한 소리였다. 등 뒤, 책상이 있는 방향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준혁 씨는 몸을 돌릴 수 없었다. 겨우 눈동자만 소리가 나는 쪽으로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수험생활 스트레스 때문에 가위에 눌리는 거겠지.'
다음 날 아침, 몸이 풀리자마자 준혁 씨는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그 밤 이후로, 가위에 눌릴 때마다 어김없이 그 소리가 함께 찾아왔다. 일주일에 한 번이던 것이 이틀에 한 번, 나중엔 거의 매일 밤으로 늘어났다.
내가 쓰지 않은 글씨
이상함을 처음 눈치챈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아침에 일어나 오답노트를 펼친 준혁 씨는 여백에 낯선 글씨가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
작고 삐뚤빼뚤한 숫자 몇 개. 분명 자신의 필체가 아니었다.
'졸면서 나도 모르게 썼나.'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그다음 주, 또 다른 페이지 여백에 이번엔 숫자가 아니라 짧은 단어가 적혀 있었다. 준혁 씨는 그제야 노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넘겨보았다.
페이지마다, 자신이 쓴 기억이 없는 글씨가 하나씩 늘어 있었다. 어떤 페이지엔 동그라미가, 어떤 페이지엔 별표가, 또 어떤 페이지엔 짧은 메모가.
혹시나 해서 잠들기 전 노트를 서랍에 넣고 잠갔다. 다음 날 아침, 서랍은 잠긴 그대로였다. 하지만 노트를 꺼내 펼쳐보니, 그 안에 또 글씨가 늘어 있었다.
점점 또렷해지는 필체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글씨는 점점 또렷해졌다. 처음엔 흐릿하게 번진 자국 같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또박또박한 필체로 바뀌어 있었다.
더 소름 끼치는 건 내용이었다. 준혁 씨가 최근 모의고사에서 틀렸던 문제의 정답이, 그 여백에 정확히 적혀 있었다. 심지어 아직 채점하지 않은 문제집에도 마찬가지였다.
"3번. 답은 3번이야."
어느 날 아침엔 그런 문장까지 적혀 있었다. 준혁 씨는 떨리는 손으로 그 문제를 다시 풀어봤다. 정답은 정말 3번이었다.
그날 밤 준혁 씨는 뜬눈으로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지쳐 잠들었고, 또다시 그 소리와 함께 가위에 눌렸다. 이번엔 눈동자를 움직여 책상 쪽을 바라보는 순간, 흐릿한 실루엣 하나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등을 돌린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무언가를 쓰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어깨의 움직임이 연필 소리와 정확히 맞물려 있었다.
총무 아저씨가 들려준 이야기
며칠 뒤, 준혁 씨는 우연히 고시원 총무와 마주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넌지시 그 방에 대해 물었다.
총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그 방, 예전에 살던 총각이 있었는데... 여기서 시험만 몇 년째 봤어요. 매번 낙방하고, 또 보고, 또 보고. 그러다 어느 날 말도 없이 짐 싸서 나갔어요. 그 뒤로 연락이 끊겼고."
"그 총각, 밤마다 책상에 앉아서 뭘 그렇게 쓰던지... 새벽에 복도 지나가면 연필 소리가 들렸어요.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나중엔 의자 소리도 안 나더라고요."
준혁 씨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신이 매일 밤 듣는 소리와 똑같았다.
손 닿을 거리
그날 밤도 어김없이 가위에 눌렸다. 스윽, 스윽, 소리가 들려왔다. 준혁 씨는 이번엔 눈을 감지 않고 끝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실루엣은 여전히 책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등을 돌린 채로.
그런데 어느 순간, 연필 소리가 뚝 멈췄다.
침묵.
준혁 씨는 심장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겨우 움직이는 눈동자로 책상 쪽을 다시 확인했다.
의자는 비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시야 가장자리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실루엣이 책상이 아니라, 침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준혁 씨는 그것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그 순간, 마비가 풀렸다. 동시에 손끝에 무언가 스치는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가느다란, 연필을 쥔 손끝 같은 감촉이었다.
그리고 귓가에,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아직도 그 방에서
준혁 씨는 그 뒤로 다른 방으로 옮겼다. 하지만 오답노트는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다.
가끔 새벽에 눈을 뜨면, 조용히 오답노트를 펼쳐본다. 아무 글씨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눈을 감는다.
그런데 얼마 전, 시험을 앞두고 유난히 지쳐 잠들었던 밤. 눈을 뜬 오답노트 여백에, 또 그 글씨가 적혀 있었다.
"다음엔, 꼭 붙어."
준혁 씨는 아직도 그 글씨가 누구의 것인지, 왜 자신을 향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요즘도 가끔, 새벽 책상 쪽에서 스윽, 스윽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창작·각색된 콘텐츠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장소, 인물이나 사건과는 무관하며,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 수면 마비(가위눌림)는 실제 의학적 현상이니 증상이 반복된다면 전문의 상담을 받아보시길 권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