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남긴 낡은 무전기
한소영 씨(가명, 31세)는 두 달 전 외할아버지를 여의었다. 향년 84세, 지병으로 오래 앓으시다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장례를 치르고 한 달쯤 지나, 소영 씨는 어머니와 함께 할아버지가 홀로 지내시던 시골집을 정리하러 내려갔다.
낡은 문갑 서랍 깊숙한 곳에서 가죽 케이스에 담긴 물건 하나가 나왔다. 군용 무전기였다. 다이얼과 손잡이는 손때로 반들반들했고, 케이스 안쪽에는 매직으로 눌러쓴 이름 석 자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이거, 외할아버지가 젊을 때부터 애지중지하시던 거야." 어머니가 말했다. "예비군 훈련 갔다 오시면 꼭 이걸로 누구랑 얘기하시고 그랬는데."
소영 씨는 오래된 물건을 좋아했다. 별생각 없이 무전기를 챙겨 서울 집으로 가져왔다. 배터리도 없고 안테나도 삭아 있었지만, 책상 한켠에 장식품처럼 세워두었다. 그저 할아버지를 추억할 물건 하나쯤으로 여겼을 뿐이었다.
밤 9시 47분, 지지직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리가 덜 끝난 어느 밤이었다. 소영 씨는 책상을 치우다 무심코 무전기의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딱히 켜질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낮은 잡음이 새어 나왔다. 지지직.
배터리를 넣은 적도 없었다. 코드를 꽂은 적도 없었다. 소영 씨는 멈칫했지만, 오래된 기계 특유의 잔류 전력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문제는 그다음 날 밤이었다. 정확히 같은 시각, 시계가 9시 47분을 가리키는 순간 무전기에서 다시 지지직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낮고 무감정한 목소리가 숫자를 읊기 시작했다.
"삼... 칠... 하나... 아홉... 삼... 일..."
소영 씨는 소름이 돋았지만 애써 웃어넘겼다. 인근 어딘가에서 잡히는 아마추어 무선 신호이거나, 낡은 기계의 전파 혼선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며칠이 흘렀다. 매일 밤 9시 47분이면 어김없이 지지직 소리와 함께 숫자가 흘러나왔다. 항상 같은 숫자, 같은 순서였다.
소영 씨는 무심코 그 숫자를 종이에 적어보다가 손이 멈췄다.
삼칠일구삼일. 자신의 생년월일이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정확했다. 그날 밤부터 소영 씨는 잠들지 못하고 무전기를 노려보며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열흘째 되던 밤, 숫자 대신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소... 영..."
또박또박, 한 글자씩 끊어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소영 씨는 얼어붙었다. 무전기 전원을 끄려 손을 뻗었지만, 스위치는 이미 꺼져 있는 상태였다. 애초에 켠 적도 없었다.
목소리는 계속됐다.
"오늘도... 파란 셔츠... 입었네."
소영 씨는 그날 정말로 파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창문 커튼은 굳게 닫혀 있었고, 이 방 안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잡음 사이로 섞여 든 낯익은 기침 소리
그 뒤로 소영 씨는 매일 밤 9시 47분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무전기를 없애지도 못했다. 어쩐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보름째 되던 밤, 여느 때처럼 지지직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번엔 평소와 달랐다.
잡음 사이로, 마른기침 소리가 섞여 들렸다. 컹, 컹. 낯익은 기침이었다. 병상에서 마지막까지 할아버지가 하시던 바로 그 기침 소리.
이어서 갈라진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아... 문... 열어놨니..."
어릴 적, 할아버지가 소영 씨를 부르던 그 애칭 그대로였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반가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 순간, 전혀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낮고, 차갑고, 사람의 것이라기엔 억양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 사람은... 못 나와."
"이제... 우리 차례야."
지지직. 그리고 뚝, 소리가 끊겼다.
소영 씨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방 안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보일 정도였다.
아직도 9시 47분이면
다음 날 소영 씨는 무전기를 골동품 수집상에게 팔아넘겼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무전기를 처분한 그날 밤에도, 9시 47분이 되자 방구석 어딘가에서 익숙한 지지직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무전기는 이미 집에 없었는데도.
소영 씨는 최근에야 어머니에게서 뒤늦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할아버지가 예비군 무전병으로 복무하던 시절, 함께 교신하던 전우 한 명이 야간 훈련 중 실종된 적이 있다고 했다. 실종 신고 접수 시각이 밤 9시 47분이었다는 것도.
할아버지는 그 뒤로 평생, 매일 그 시각이 되면 홀로 무전기 앞에 앉아 채널을 맞췄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소영 씨는 지금도 밤 9시 47분이 다가오면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인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시달린다.
그 목소리는 할아버지였을까. 아니면 그 옆에서 함께 부르던, 아직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누군가였을까.
확실한 건 하나뿐이다. 그 시각이 되면, 누군가는 여전히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
이 이야기는 완전히 창작·각색된 콘텐츠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인물이나 장소, 사건과는 무관하며,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