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해째, 같은 노선
한상철 씨(가명, 54세)는 올해로 17년째 심야버스를 몰고 있다. 그가 맡은 노선은 자정 12시 20분, 도심 환승센터를 출발해 외곽 공단 지역을 거쳐 고은동 차고지까지 이어지는 심야 08번. 막차인 만큼 손님은 많지 않다. 많아야 대여섯 명, 새벽 한 시가 넘으면 버스 안은 거의 텅 비어 있다.
심야버스에는 낮 노선에는 없는 규정이 하나 있다. 정류장이 아니어도 도로변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으면, 안전을 위해 일단 세운다는 것. 한 씨는 그 규정을 17년 동안 어긴 적이 없었다.
그날 밤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자정을 넘긴 시각, 승객 세 명을 태우고 공단 외곽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옅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흔드는 손
00시 47분. 한 씨는 도로변에 서 있는 낡은 표지판 기둥을 지나쳤다. 정확히는, 기둥만 남아 있었다. 팻말도 지붕도 없이, 녹슨 쇠기둥 하나만 잡초 사이에 박혀 있는 자리. 12년 전 노선이 재편되며 폐쇄된 정류장 자리였다.
그 기둥 옆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안개 속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규정대로, 한 씨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문이 열렸다. 회색 점퍼를 입은 사람이 말없이 올라탔다.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교통카드를 찍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한 씨는 계기판의 카드 인식 표시등을 흘끗 봤다. 반응이 없었다. '카드가 고장 났나 보다' 생각하며 넘겼다. 그 사람은 맨 뒷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카드는 찍히지 않았다
그 뒤로 한 씨는 그 시각, 그 자리를 유심히 보게 됐다. 이상하게도 매번, 정확히 00시 47분이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같은 회색 점퍼. 같은 침묵. 그리고 매번, 카드 인식음은 울리지 않았다.
한 씨는 회사 관제센터에 문의했다. 돌아온 대답은 더 이상했다.
"그 정류장, 시스템에 아예 없어요. 폐쇄된 지 12년 됐는데... 근데 왜 자꾸 그 위치에서 하차벨 신호가 잡히죠? 좌석 배정도 안 된 구역에서요."
관제센터 기록에는 매일 새벽, 정확히 그 좌표에서 하차벨 신호가 잡혔다. 문제는 그 자리가 원래 좌석이 없는 구역이라는 것. 심야버스 개조 과정에서 휠체어 공간을 만들며 맨 뒷줄 좌석 하나를 들어낸 자리였다.
그 사람은 언제나 그 빈자리에, 마치 좌석이 있는 것처럼 앉았다.
그 밤, 창문이 젖어 있었다
보름쯤 지난 밤, 여느 때처럼 그 사람을 태우고 종점을 향해 달리던 중이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다.
그 순간, 하차벨이 울렸다.
딩동.
표시등을 봤다. 맨 뒷줄, 좌석이 없는 그 구역이었다.
한 씨는 문을 열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뒤쪽을 살폈다.
자리는 비어 있었다.
바닥에, 젖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발자국은 좌석이 있던 자리에서 시작해, 비상용 뒷유리창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유리창 안쪽에는 김이 서린 것처럼 뿌옇게 손자국 하나가 찍혀 있었다.
손가락이 다섯 개였다. 지나치게 길었다.
그 창문은 밖에서만 깨서 열 수 있는 비상용 강화유리였다. 안에서는 열리지 않는다. 깨진 흔적도 없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한 씨는 다시 앞을 보고 출발했다. 그리고 몇 분 뒤, 그 낡은 정류장 기둥 앞을 다시 지나게 됐다.
그 자리에, 회색 점퍼를 입은 사람이 다시 서 있었다.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방금 자신을 태우고 사라졌던 그 사람이, 마치 처음 타는 사람처럼.
아직도 울리는 벨
한 씨는 그날 이후 그 정류장 근처를 지날 때마다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손을 흔드는 사람이 보여도, 그 자리가 정류장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이제는 그냥 지나친다.
며칠 뒤, 다른 노선을 모는 동료 기사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노선에도 오래전 폐쇄된 정류장이 하나 있고, 거기서도 자정 넘은 시각에 손을 흔드는 사람을 봤다는 기사가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회사는 공식적으로 그런 규정도, 기록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심야버스 기사들 사이에서는 조용히 전해진다. 폐쇄된 정류장 앞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을 보면, 절대 세우지 말라고.
한 씨는 지금도 가끔 차고지에 버스를 대고 나서, 텅 빈 버스 맨 뒷줄 표시등이 혼자 깜빡이는 걸 본다.
아무도 타지 않은 버스에서.
혹시 자정이 넘은 심야버스를 타신다면, 하차벨 표시등이 가리키는 자리를 한번 확인해 보시길.
그 자리에... 정말 좌석이 있는지.
이 이야기는 완전히 창작·각색된 콘텐츠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인물이나 장소, 사건과는 무관하며,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