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남긴 놋그릇
이서윤 씨(가명, 29세)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다가 부엌 찬장 깊숙한 곳에서 낡은 놋그릇 한 벌을 찾았다. 제사 때만 꺼내 쓰던, 반질반질하게 손때가 묻은 그릇이었다.
어머니는 다른 유품들을 대부분 정리하면서도 그 그릇만은 손대지 않고 그대로 서윤 씨에게 넘겼다.
"이건 제사 때 말고는 절대 밥 담지 마라. 할아버지가 그렇게 당부하셨어."
이유는 묻지 않았다. 자취방에 살림이 넉넉지 않았던 서윤 씨는 며칠 뒤, 마땅한 밥그릇이 없어 별생각 없이 그 놋그릇에 밥을 퍼 담아 먹었다.
씻어도 다시 채워지는 밥
다음 날 아침, 서윤 씨는 개수대에 엎어놓았던 놋그릇을 보고 멈칫했다. 분명 깨끗이 씻어 물기까지 털어 엎어두었는데, 그릇 안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이 소복이 담겨 있었다.
누가 장난을 친 건가 싶었다. 혼자 사는 집이었다. 밥솥은 며칠째 켜지도 않은 채였다.
서윤 씨는 밥을 버리고 그릇을 다시 몇 번이고 씻어 찬장 안쪽 깊숙이 넣어두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찬장 문을 열었을 때 놋그릇은 다시 뜨거운 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옆에는, 원래 세트로 딸려 있던 놋쇠 수저 한 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서윤 씨는 그 수저 세트를 꺼내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 몫의 밥상
서윤 씨는 그제야 어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오래 뜸을 들이던 어머니는 결국 이야기를 꺼냈다.
할아버지에게는 어릴 때 세상을 떠난 형이 있었다고 했다. 전쟁통에 미처 챙기지 못해 굶어 죽은 형이었다. 할아버지는 평생 그 형의 제사를 유난히 정성스럽게 챙겼고, 그 놋그릇과 수저 한 벌만은 오직 그날을 위해 남겨두었다는 것이었다.
"밥그릇으로 쓰면... 할아버지 형님이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여기시는 걸까 봐, 그래서 손도 못 대게 하신 거야."
서윤 씨는 소름이 돋았지만, 그렇다고 그릇을 함부로 버릴 수도 없었다. 그날 밤, 서윤 씨는 잠결에 부엌 쪽에서 옅은 온기와 갓 지은 밥 냄새가 방 안까지 스며드는 걸 느꼈다.
베갯머리에 놓인 밥그릇
새벽녘, 서윤 씨는 이상한 냄새에 눈을 떴다. 갓 지은 쌀밥 냄새가 코앞에서 났다.
베갯머리 바로 옆, 방바닥에 그 놋그릇이 놓여 있었다. 여전히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밥과, 가지런히 놓인 놋쇠 수저 한 벌과 함께.
부엌 찬장 안에 넣어두었던 그릇이었다.
서윤 씨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누군가 방금까지 그 옆에 앉아, 자신이 잠든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년 그날, 밥을 짓는다
서윤 씨는 결국 무속인을 찾아가는 대신, 어머니와 함께 할아버지의 형을 위한 제사상을 따로 차리기로 했다. 정확히 그 형이 세상을 떠난 날짜에, 그 놋그릇과 수저로만 소박한 밥 한 그릇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 뒤로 놋그릇은 더 이상 저절로 채워지지 않았다. 서윤 씨는 지금도 그 그릇을 찬장 맨 위 칸,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고이 넣어두고 있다.
다만 매년 그날이 다가오면, 미리 밥을 짓지 않았는데도 부엌에서 옅은 밥 냄새가 며칠 먼저 풍겨온다고 한다. 마치 누군가 그날을 잊지 말라고, 미리 알려주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완전히 창작·각색된 콘텐츠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인물, 장소, 사건과는 무관하며,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