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원짜리 만년필
한 씨(가명, 31세)는 지난 일요일, 동네 주말 벼룩시장에서 만년필 하나를 만 원에 샀습니다. 검은 몸통에 금색 클립이 달린 오래된 펜이었습니다. 좌판을 지키던 노인은 값을 깎지도 않고 오히려 서둘러 포장해 주었습니다.
「제가 쓰던 건 아니고요. 받아 둔 건데, 쓸 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카트리지에는 짙고 선명한 푸른 잉크가 반쯤 남아 있었습니다. 종이에 대어 보니 촉이 놀랄 만큼 부드럽게 미끄러졌습니다. 한 씨는 그날 밤 책상 앞에 앉아 별 의미 없는 글씨를 한참 썼습니다.
화요일 밤에는 용도가 생겼습니다. 이틀 뒤가 오래된 친구 서윤의 생일이었고, 사흘 뒤에는 어머니의 환갑이었습니다. 한 씨는 새 펜으로 정성껏 두 장의 카드를 썼습니다. 그리고 봉투 앞면에 받는 사람의 이름을 한 획씩 또박또박 적었습니다.
잉크는 이상하게 오래 마르지 않았습니다. 이름 글씨만 이튿날 아침까지 젖은 듯 반짝였습니다.
서윤의 얼굴
수요일 점심, 한 씨는 서윤과 만나 카드를 건넸습니다. 서윤은 웃으며 봉투를 열었고, 둘은 평소처럼 김치찌개를 먹었습니다. 어머니의 카드는 같은 날 오후 우체국에서 등기로 부쳤습니다.
문제는 목요일 아침에 시작되었습니다.
출근길에 서윤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는데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걸자 한참 만에 받았고,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낯설 만큼 조심스러웠습니다.
「저... 누구세요?」
장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씨가 웃으며 이름을 말했지만 서윤의 목소리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번호가 저장되어 있긴 한데... 죄송해요. 저, 정말 모르겠어요.」
한 씨는 점심시간에 서윤의 회사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서윤은 로비에서 한 씨를 보자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한 씨가 휴대폰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 주자 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이 사진 속에 제가 있는 건 맞는데, 이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제가 왜 이 사람이랑 웃고 있는지...」
서윤은 한 씨 말고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직장도, 가족도, 어제 점심에 김치찌개를 먹은 것까지. 다만 누구와 먹었는지는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한 씨가 있던 자리만 칼로 도려낸 듯 비어 있었습니다. 한 씨와 함께한 십 년 치 기억이 말입니다.
이름이 적힌 사람
그날 밤 한 씨는 화요일 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봉투를 떠올렸습니다. 카드 속 글씨는 금세 말랐는데, 받는 사람의 이름 글씨만 밤새 마르지 않고 젖은 듯 빛나던 것을 말입니다.
책상 위의 만년필을 집어 들었습니다. 몸통은 평범하게 차가웠습니다. 뚜껑을 열자 푸른 잉크가 촉 끝에서 천천히 방울져 떨어져, 책상 위의 빈 봉투에 번졌습니다. 마치 다음 이름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제야 한 씨는 한 가지를 떠올리고 온몸이 굳었습니다. 화요일 밤, 같은 펜으로 쓴 이름은 서윤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한 씨는 곧바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늘 오전에 카드를 받았다며 반가워했습니다. 「우리 아들이 이런 걸 다 쓰고.」
한 씨는 그 목소리가 멀쩡한 것에 잠깐 안도했지만, 곧 날짜를 세어 보았습니다. 서윤은 카드를 받은 다음 날 아침에 한 씨를 잊었습니다. 어머니가 카드를 받은 것은 오늘이었습니다. 밤새 뒤척이다 맞은 금요일, 어머니의 환갑날 아침에 한 씨는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습니다. 퇴근하고 나서야,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눌렀습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다 어머니가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엄마, 저예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식탁에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죄송해요. 번호를 잘못 거신 것 같은데. 저는 아들이 없어요.」
아직 쓰지 못한 이름
한 씨는 그 뒤로 어머니를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문 앞에서 낯선 눈으로 쳐다볼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년필은 토요일 아침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한 씨는 압니다. 이미 쓰인 이름들은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오후, 한 씨는 휴대폰 매장에서 신청서를 쓰다가 볼펜을 쥔 손을 멈추었습니다. 직원이 말했습니다.
「성함은 직접 쓰셔야 합니다.」
한 씨는 자기 이름의 첫 글자를 쓰려다 손을 거두었습니다. 손에 쥔 것이 그 만년필이 아니라는 것은 한 씨도 압니다. 그런데도 손이 떨렸습니다.
그 만년필이 아직 한 번도 쓰지 않은 이름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씨 자신의 이름. 그 펜으로 자기 이름을 적으면, 이번에는 누가 누구를 잊게 될까요.
강물에 던진 그 펜은 지금쯤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창작된 공포 이야기이며,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는 실제와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