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박이장 맨 위 칸
정 씨(가명, 31세)는 지난 9월 초, 오래된 빌라 삼층으로 이사했습니다. 짐을 풀다 침실 붙박이장 맨 위 칸에서 작은 종이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신발 상자만 한 크기였고, 뚜껑 이음매를 따라 갈색 포장 테이프가 몇 겹이고 두껍게 감겨 있었습니다.
뚜껑 위에는 매직으로 쓴 글씨가 있었습니다.
「열지 마세요. 해마다 구월 말에 테이프 한 겹.」
그 아래에는 짧은 줄 다섯 개가 그어져 있었습니다. 다섯 해, 다섯 겹.
정 씨는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집주인은 잠깐 말이 없다가, 전 세입자가 다섯 번의 가을을 이 집에서 보내고 지난 8월에 급하게 나갔다고만 했습니다. 상자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정 씨는 찜찜했지만 상자를 그대로 두고 장 문을 닫았습니다. 이삿짐을 싸고 남은 포장 테이프 롤이 책상 위에 굴러다녔지만, 구월 말이 지나도록 테이프는 감지 않았습니다.
안쪽에서 갈라진 테이프
10월 첫 주의 어느 아침, 정 씨는 외투를 꺼내려고 붙박이장을 열었다가 상자를 보았습니다. 뚜껑 바로 아래, 앞면 테이프에 손톱만 한 틈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틈의 모양이었습니다. 갈라진 테이프 끝이 전부 바깥쪽으로 말려 있었습니다. 밖에서 칼로 그은 자국이 아니었습니다. 안에서 무언가가 밀어낸 자국이었습니다.
정 씨는 그날부터 매일 아침 장을 열어 보았습니다. 틈은 하루에 조금씩 길어졌고, 그 아래 종이 상자까지 함께 찢겨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장 문을 열 때마다 그 틈에서 차가운 공기가 새어 나왔습니다. 시월 초의 방 안에서, 냉장고 문을 연 것처럼.
정 씨는 상자를 버릴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뚜껑 위의 글씨가 자꾸 떠올랐습니다. 열지 말라고 했지, 버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섯 해 동안 누군가는 이 상자를 버리지 않고 해마다 한 겹씩 감아 왔습니다. 그럴 이유가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지익, 지익
지난주 목요일 밤, 정 씨는 책상 스탠드를 켜 둔 채 잠들었다가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새벽 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습니다.
지익.
포장 테이프를 아주 천천히 뜯어내는 소리였습니다. 소리는 붙박이장 안에서 났습니다.
지익.
정 씨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붙박이장 앞에 섰습니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렸습니다. 소리가 멈췄습니다. 정 씨는 숨을 한 번 삼키고 문을 열었습니다.
스탠드 불빛이 맨 위 칸까지 희미하게 닿았습니다. 상자 앞면의 틈은 이제 손가락 두 마디만큼 벌어져 있었고, 그 틈 안은 상자 크기로는 있을 수 없을 만큼 깊고 까맸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핏기 없는 창백한 손가락 하나가 천천히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손끝이 아래를 향한 채, 마치 바깥 공기를 더듬어 보는 것처럼 그저 거기 있었습니다.
정 씨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 손에는 책상 위에 있던 이삿짐 테이프 롤이 거의 다 쓴 채 들려 있었고, 상자는 뚜껑부터 바닥까지 갈색 테이프로 빈틈없이 감겨 있었습니다. 손가락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 씨는 떨리는 손으로 매직을 찾아, 다섯 줄 옆에 여섯 번째 줄을 그었습니다.
여섯 번째 줄 옆에
그날 이후 테이프는 더 이상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장 문을 열어도 찬 공기는 새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흘 뒤 아침, 상자를 확인하던 정 씨는 뚜껑 위에서 처음 보는 글씨를 발견했습니다. 정 씨가 그은 여섯 번째 줄 바로 옆이었습니다. 같은 매직으로, 정 씨의 것이 아닌 글씨체로 적혀 있었습니다.
「늦었네요. 내년엔 늦지 마세요.」
정 씨의 계약은 내년 가을까지입니다. 정 씨는 벌써 달력의 내년 구월 칸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이사를 나가는 날을 생각합니다. 그날 이후에는 누가 이 상자에 테이프를 감게 될지.
이 이야기는 괴담과 체험담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창작되었습니다. 등장인물과 장소는 실제와 무관합니다. 심장이 약하신 분은 주의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