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부터 아침까지, 넉 달째
올해 스물여덟인 이수정 씨(가명)는 지방의 한 요양병원에서 야간 전담 요양보호사로 일한 지 넉 달째였다. 근무 시간은 자정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3층 병동, 스무 명 남짓한 어르신들이 잠든 사이 간호사 한 명과 함께 병동을 지키는 일이었다.
처음 몇 주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체위 변경, 기저귀 확인, 콜벨 응대, 순회. 몸은 고됐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한 새벽, 취침등만 어슴푸레 켜진 복도를 걷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곤 했다.
그날 밤, 인수인계를 마친 선임 박은주 씨(가명)가 나가려다 말고 갑자기 돌아섰다.
"수정 씨, 하나만 기억해요. 복도 끝, 그 병실 앞에서 서성이는 흰 그림자 같은 거 보이면… 그냥 못 본 척 지나가요. 절대 따라가지도, 말 걸지도 말고."
수정 씨는 웃으며 넘겼다. 넉 달을 근무하며 그런 건 한 번도 못 봤으니까.
"그냥 지나가면 돼요"
이상하게도, 그 규칙을 진지하게 말하지 않는 직원이 없었다. 야간조 선배들은 하나같이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절대 세지 말고, 절대 눈 마주치지 말고, 그냥 걸음만 옮기라고.
수정 씨는 처음엔 신입을 놀리는 통과의례쯤으로 여겼다. 병동 특성상 밤새 여러 소리가 나기 마련이었다. 낮은 코골이, 헛소리, 산소포화도 모니터의 규칙적인 비프음. 어두운 복도 끝을 지날 때 순간적으로 헛것을 보는 일도 있을 법했다.
그런데 넉 달째 접어든 어느 날부터, 수정 씨도 그 '규칙'을 몸으로 이해하게 됐다.
새벽 4시 44분
처음 그것을 들은 건 근무 넉 달째 되던 주의 화요일이었다.
새벽 순회를 마치고 스테이션에 앉아 있는데, 복도 저편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삐걱, 삐걱. 처치 카트 특유의, 한쪽 바퀴가 살짝 어긋난 듯한 소리였다.
시계를 봤다. 4시 44분.
이상했다. 카트는 분명 처치실 안쪽 벽에 세워두고 나왔는데. 수정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확인했다. 카트는 처치실 안, 원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날 이후로 수정 씨는 그 소리를 매일 밤 듣기 시작했다. 정확히 4시 44분.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가 복도 끝에서 시작해 스테이션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마치 누군가 카트를 밀고 오는 것처럼. 그러나 복도를 아무리 살펴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같은 시각, 3층 복도 끝 906호 앞을 지날 때마다 훅 끼치는 냉기도 느끼기 시작했다. 에어컨 바람이라 하기엔 너무 국소적이고, 너무 차가웠다. 그 앞을 지날 때면 산소포화도 모니터의 규칙적인 비프음이 잠깐씩 불규칙하게 어긋나는 것도 같았다.
최말순 할머니
3층에는 유독 정이 가는 환자가 있었다. 906호, 최말순 할머니(가명, 87세). 야간 순회 때마다 잠들지 않고 도란도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병동에서 몇 안 되게 살가운 분이었다.
"우리 수정이 왔나. 오늘은 무슨 얘기 해줄까."
수정 씨는 새벽 순회 틈틈이 할머니 병실에 들러 손을 잡아드리곤 했다. 정신은 또렷했지만, 기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다는 걸 수정 씨도 알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였다. 4시 44분의 카트 소리가 유독 906호 근처에서 오래 머무는 날이 잦아진 건.
처음엔 착각이라 여겼다. 하지만 소리는 점점 또렷해졌고, 냉기는 점점 짙어졌다. 복도 저편, 취침등 불빛이 닿지 않는 906호 앞에서 무언가 흰 형체가 서성이는 걸 본 것도 그즈음이었다. 사람 같기도, 안개 같기도 한 형체가 문 앞을 왔다 갔다 하다가, 수정 씨와 눈이 마주치기 직전 스르르 사라졌다.
수정 씨는 박은주 씨의 말을 떠올렸다. 못 본 척 지나가라던.
카트가 멈춘 새벽
그리고 그 새벽이 왔다.
여느 때처럼 4시 44분,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왔다. 수정 씨는 규칙대로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려 애썼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906호 앞에서 뚝 멈췄다.
침묵.
906호 산소포화도 모니터의 비프음이 갑자기 불규칙해졌다. 삑— 삑, 삑삑—.
수정 씨는 손끝이 떨렸다.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가 걱정되는 마음이 몸을 먼저 움직였다.
복도로 나섰다. 취침등 불빛이 점점 흐릿해지는 듯했다. 소독약 냄새 사이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한 냄새가 섞여 들었다.
906호 앞에 다다랐다.
그것이 거기 서 있었다.
문 앞, 흐릿하고 형체가 일렁이는 무언가.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수정 씨는 숨을 멈췄다.
그것이, 천천히 고개만 돌렸다.
수정 씨 쪽을 향해서.
심장이 내려앉았다. 온몸이 얼어붙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깜빡였다.
그 짧은 순간,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복도엔 다시 정적만 남았고, 906호 모니터의 비프음도 어느새 다시 규칙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근무
다음 날 오전, 인수인계를 하러 온 주간 근무자에게서 짧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최말순 할머니가 가족이 있는 병원으로 전원됐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었지만 명확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족분들이 갑자기 그렇게 결정하셨대요."
그게 전부였다.
수정 씨는 그 새벽에 자신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얼마 뒤, 그 병동에서 오래 일한 간호사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몇 년 전, 야간조에 있던 어느 요양보호사가 그 흰 그림자를 정면으로 마주 봤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다음 달, 근무표에서 그 사람의 이름이 조용히 사라졌다고.
"그만뒀다는 얘기도 있고, 다른 병원으로 갔다는 얘기도 있고… 아무도 확실하게는 몰라요."
수정 씨는 지금도 야간 근무를 계속하고 있다. 4시 44분이 되면 여전히 손끝이 저릿해지고, 906호 앞을 지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는다.
그리고 몇 주 전 새벽, 처치를 마치고 잠깐 휴게실에서 눈을 붙이려던 순간. 익숙한 그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가, 이번엔 복도가 아니라 휴게실 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수정 씨는 아직도 그날, 그 문을 열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창작·각색된 콘텐츠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병원, 인물이나 사건과는 무관하며,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