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가디건
번역가 한 씨(가명, 31세)는 재택근무 3년 차였습니다. 하루 대부분을 작은방 책상 앞에서 보냈고, 외출은 장보기와 산책이 전부였습니다. 10월 첫째 주 목요일,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래층 이웃이 말했습니다.
"아까 저녁에 올라가시는 거 봤어요. 그 회색 가디건 입고 계셨죠?"
한 씨는 그 시각 책상에서 마감 중이었습니다. 가디건은 맞았습니다. 한 씨는 어색하게 웃고 넘겼습니다. 닮은 사람이겠거니 했습니다.
어긋나는 목격담
다음 주 화요일에는 편의점 점원이 말했습니다.
"방금 다녀가셨잖아요. 삼각김밥 두 개 사 가시고요."
그 시각 한 씨는 화상회의 중이었고, 녹화 파일에 얼굴이 남아 있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어머니가 전화로 물었습니다.
"어제 왔다 갔으면서 왜 말도 안 하고 밥만 먹고 갔니?"
한 씨는 어머니 집에 간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분명히 딸이 식탁에 앉아 국에 밥을 말아 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한 씨는 숟가락을 쥔 손의 모양을 물었고,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왼손으로 먹더라. 너 오른손잡이잖아. 그래서 이상하다 했지."
그날 밤 한 씨는 도어락 앱을 열어 보았습니다. 출입 기록에는 지난 일주일 동안 매일 저녁 7시 40분, '비밀번호 열림'이 찍혀 있었습니다. 한 씨는 그 시각이면 늘 헤드폰을 끼고 작은방에서 일했습니다. 집 안에서 없어진 물건은 없었습니다. 그저 누군가 들어왔다 나갔을 뿐이었습니다.
한 씨는 다음 날 오후 비밀번호를 바꿨습니다. 새 번호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새벽 3시 12분
그날 밤, 한 씨는 안방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현관에는 안전 체인까지 걸어 두었습니다.
삐. 삐. 삐. 삐. 삐. 삐.
여섯 번의 버튼음에 한 씨는 눈을 떴습니다. 시계는 3시 12분이었습니다. 이어서 잠금이 풀리는 기계음이 났습니다. 반나절 전에 바꾼,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새 번호였습니다.
문이 바깥으로 열렸습니다. 체인이 팽팽해지며 철컥, 하고 멈췄습니다. 문틈은 한 뼘 정도였습니다.
한 씨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습니다. 복도 센서등이 켜졌는지, 문틈으로 하얀 빛이 바닥에 길게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빛 속에, 문틈 너머에서 누군가 한 씨를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한 씨의 얼굴이었습니다.
회색 가디건. 헝클어진 앞머리. 다만 가르마가 반대쪽으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보던 얼굴, 좌우가 뒤집힌 바로 그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습니다.
"체인 풀어."
한 씨의 목소리였습니다. 녹음된 자기 목소리를 들을 때의 그 어색함이 전혀 없는, 평소 머릿속에서 울리는 바로 그 목소리였습니다.
"이제 네가 나갈 차례야."
한 씨는 문고리를 붙잡고 온몸으로 잡아당겨 문을 닫았습니다. 도어락이 다시 잠기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한 씨는 그대로 현관에 주저앉아 아침을 기다렸습니다.
이사한 첫날 아침
날이 밝고 확인한 도어락 기록에는 3시 12분의 '비밀번호 열림'이 정확히 남아 있었습니다. 복도 쪽 CCTV 영상은 관리실에 요청했지만, 그 시각 영상에는 센서등이 켜지고, 한 씨네 현관문이 혼자서 한 뼘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장면만 있었습니다.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 씨는 사흘 뒤 급히 다른 동네로 이사했습니다. 이사 날짜도, 새 집 주소도 가족 외에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사한 첫날 아침, 옆집 문이 열리더니 처음 보는 이웃이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어머, 어제 저녁에 먼저 인사하러 오셨었는데. 회색 가디건 입고요."
한 씨는 이사 온 지 하루도 되지 않았고, 어제 저녁에는 짐을 푸느라 한 번도 집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체험담을 바탕으로 각색되었으며, 체험자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심장이 약하신 분은 주의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