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에 늘어난 그림
김하윤 씨(가명, 29세)는 3년째 오래된 상가건물 3층 공유작업실에서 개인 데스크 한 자리를 쓰고 있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였다. 그림을 마칠 때마다 페이지 한쪽 구석에 자신의 이니셜을 새긴 작은 목도장을 낙관처럼 찍는 것이 오랜 습관이었다.
어느 날 아침, 작업실에 도착한 하윤은 스케치북을 펼치다 멈칫했다. 마지막으로 그렸던 페이지 다음 장에, 그린 기억이 없는 그림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작업실 문 쪽에서 바라본 자신의 뒷모습이었다. 붓 터치도, 명암을 넣는 방식도 완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구석에는 낙관 도장까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전날 밤 너무 피곤해서 기억 못 하는 걸까. 하윤은 애써 그렇게 넘겼다.
조금씩 돌아가는 얼굴
며칠에 한 번씩, 비슷한 그림이 계속 늘어났다. 이상하다고 느낀 하윤은 어느 밤 그림들을 순서대로 늘어놓아 보았다.
첫 번째 그림은 완전한 뒷모습이었다. 두 번째는 고개가 아주 살짝 옆으로 기울어 있었다. 세 번째는 옆얼굴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 아주 천천히,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과정을 며칠에 걸쳐 나눠 그려온 것 같았다.
하윤은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남은 빈 페이지를 세어보았다. 이 속도라면, 완전히 마주 보는 얼굴이 그려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셈이었다.
확인해보기로 한 밤
계약 때문에 자리를 쉽게 옮길 수 없었던 하윤은 확인해보기로 했다. 스케치북 마지막 페이지 사이에 머리카락 한 올을 몰래 끼워두었다.
다음 날, 머리카락은 사라져 있었고 새 그림이 한 장 더 늘어나 있었다.
결국 하윤은 어느 밤, 평소처럼 퇴근 인사를 하고 건물을 나섰다가 조용히 다시 돌아왔다. 복도 끝 어두운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작업실 문틈으로 안쪽을 지켜보기로 했다.
자정 무렵, 아무도 들어가는 인기척이 없었는데도 문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문틈 사이로 본 것
하윤은 숨을 죽이고 문틈에 눈을 가져다 댔다.
자신의 자리에, 자신과 똑같은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한 존재가 앉아 스케치북 위로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그리고 있는 페이지의 각도를 본 순간, 하윤은 그것이 바로 다음 순서라는 걸 알아챘다. 거의 정면에 가까운, 마주 보기 직전의 각도.
손이 멈췄다.
그리고 그림 속 각도와 똑같이, 아주 천천히 고개가 실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윤은 자신도 모르게 물러서다 어깨로 문을 부딪혔다. 둔탁한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불빛이 한순간에 꺼졌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케치북은 펼쳐진 그대로였다. 방금 그리다 만 줄 알았던 그림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완전히 마주 본, 자신의 얼굴. 구석에는 낙관 도장까지, 이미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새 스케치북 첫 장
그날 이후 하윤은 그 스케치북을 다시 펼치지 않았다. 새 스케치북을 사서 작업실로 가져갔다.
며칠은 아무 일도 없었다. 안도한 것도 잠시, 어느 아침 새 스케치북 첫 장에 낯익은 그림 한 장이 끼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문 쪽에서 바라본, 완전한 자신의 뒷모습.
낙관 도장은, 이미 찍혀 있었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창작·각색된 콘텐츠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인물, 장소, 사건과는 무관하며,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